[국내여행, 02.11. ~ 02.13.] Day 1 02.11. (2) - 경주
경주에 밤이 찾아왔다.
3시간을 쉬지 않고 걸었더니 다리가 슬슬 저려온다. 조금 숨 돌리고 재충전의 시간이 필요함을 느꼈다. 배도 고프고해서 근처의 식당을 찾으려고 이리저리 돌아다녔는데...경주 사람들은 빵만 먹고 사나 왜 이렇게 밥집이라고 부를만한 곳이 없는지...조금 걸어가도 무리해서 가려고 스마트폰으로 맛집을 검색해보았으나, 경주에서 맛집을 찾는 것만큼 어리석은 것은 없다는 것을 느꼈다. 경주역 바로 앞에 있는 성동 시장에 가면 먹을 것이 좀 있다는 의견을 인터넷에서 발견하고는, 거리가 멀지 않아서 바로 성동 시장으로 향했다.
시장에 들어선게 저녁 6시 반 즈음이었는데 몇몇 가게가 정리하고 있길래 뭔가 조바심이 났다. 밥하는 곳도 닫았으면 어쩌지 하면서 서둘러 밥집을 찾아다녔다. 좀 더 돌아다니니 구석 즈음에 밥집이 몰려있어서 갔는데...솔직히 당황스러웠다. 일반 밥집처럼 주문한 음식이 나오는게 아니고 밑반찬을 수북히 쌓아놓고서는 골라서 먹으라는 한식 뷔페식이었던 것이다. 문제는 반찬의 위생 상태였다. 쌓아놓고 시장 바닥에 내놓으니까 벌레가 안꼬일리가 없다...배는 고프고 더 이상 돌아다닐 힘도 별로 없는데, 몸은 여기서 먹으라고 하는데 머리는 계속 제동을 건다. 그런데 이 때 내 앞에 등장하신 한 아주머니.
"밥 먹으러 왔어? 드루와 드루와"
?????
"아 드루와 드루와"
뭔가 내가 당연히 밥 먹으러왔다는 듯 단정짓는 저 어마어마한 내공과 패기. 벙져서 그냥 따라갔다. 뭐 이리저리 안내를 해주시는데 웃으면서 알겠습니다라고 하고 먹고 싶은대로 퍼담았다. 뭐 한 입씩 먹어보니 아침부터 있던거라 차갑고 가끔씩 이상한게 씹히고...아주머니는 은근히 남기지 말라고 압력을 행사하시는데...소고기국까지 주셔서 맛은 생각안하고 (안남길라고) 그냥 허겁지겁 먹었던 것 같다. 아니 지금 생각해보면 한번 정도는 먹을만 했다. 여행자들을 많이 겪어보신 듯 밤에는 어디로 가라 하시며 살뜰히 챙겨주셔서 감사했다. 꼴에 빈 말은 못해서 또 올게요라는 말은 못했지만, 그래도 속이 참 든든해져서 시장을 떠났다.
게스트하우스가 밤 10시까지 체크인을 해야되는데 아무래도 야경 보면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면 밤 10시 이전까지 체크인을 못할 것 같아서 게스트하우스 먼저 가서 체크 인을 했다. 내가 예약한 숙소는 대릉원 바로 앞에 있는 여행길 게스트하우스인데 다른 것보다도 내일러들에게는 2000원 할인을 해준다는 점, 그리고 위치 선정이 인자기 급으로 기가 막히다는 점이 매력적이었다. 들어가보니 시설도 깨끗하고 괜찮았다. 뭐 유럽에서처럼 자유로운(?) 분위기를 기대할 수는 없겠지만 혼자 하루 묵었다 가는 곳인데 냄새만 안나면 괜찮았다.
숙소에서 30분 정도 쉬고 야경을 보려고 다시 길을 나섰다. 왠지 모르게 안압지의 야경을 보면서 뜨뜻한 황남빵을 한 입 베어물고 싶다는 뜬금없는 생각이 들어서, 그리고 참 운이 좋게도 가는 길에 황남빵 본점이 있길래 황남빵 본점부터 들르려고 했다. 그런데 원래 오후 10시까지 오픈이고 나는 오후 8시 쯤에 방문했는데 문이 닫혀있었다. 할 수 없지만 그 근처에 찰보리빵은 많이 팔아서 좀 더 걸어서 찰보리빵의 원조라는 집에서 제일 작은 박스 하나 샀다. 찰보리빵이 경주의 명물 중 하나라는 것도 처음 들었고, 찰보리빵이라는 것 자체도 경주 오면서 처음 들었다. 뭐 어쨌거나 먹을 거리는 마련했으니까 가면서 먹던지 구경하면서 먹던지, 진짜 경주에 온 느낌을 한껏 낼 수 있겠다 싶었다(찰보리빵 사고 나와서 안압지 가는 길에 보니 황남빵집 열려있던 것은 함정).
이상할 정도로 밤공기가 따뜻했다. 덕분에 안압지 가는 길은 춥지 않았다. 가는 길에 안압지 방향으로 가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경주 야경의 핫플레이스 답게 경주의 여행자들이라면 응당 거쳐가야할 필수 코스처럼 되어버린 모양이다. 안압지는 예전에도 갔었지만, 야경은 처음이었는데 가서 직접 목도하니 왜 여행자들의 필수 코스인지를 실감할 수 있었다.
유럽 여행을 다니면서 세계적으로 명성이 자자한 여러 도시의 야경들을 보았지만, 그동안 국내에서는 그와 쌍박을 이루는 야경을 보지는 못했다. 그런데 이번에 가서 본 안압지의 야경 정도면, 진짜 세계 어느 나라에 내놓아도 꿀리지 않을 정도라고 생각한다. 신라의 궁정의 고전적인 아름다움에다가 형형색깔의 조명을 더하여 아주 세련되게 꾸며놓았다. 이에 가장 기여한 것은 연못에 빛이 그대로 비치는 것일테다. 그만큼 신라인들이 애초에 베이스를 아주 예쁘게 만들어놓았고, 그에 기초하여 현대적인 색깔을 덧입히니 아주 예술작품이 나왔다. 사람 많은 곳은 개인적인 감상에 방해가 되고 감흥이 떨어질 우려가 큰데, 이 곳은 왜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는가에 대해 당연하다는 듯이 그 아름다움을 증명한다. 안압지에 들어서면 대개 시계 방향으로 코스를 돌게 되는데 좋아서 두세바퀴는 돌았던 것 같다. 주머니 안에 있던 찰보리빵도 까맣게 잊은 채로 말이다. 돌면 돌수록 마치 별 사이를 걷는 느낌이었다.
안압지를 뒤로 하고 게스트하우스로 돌아가는 길에 이번엔 경주의 랜드마크 첨성대의 야경을 보러갔다. 밤에 첨성대를 보는 것이야말로 이 건축물의 의미에 부합하는 적절한 감상 태도가 아닐까 싶었다. 가면서 뒤늦게 찰보리빵 생각이 나서 까먹으면서 걸어갔는데, 솔직히 특별한 맛은 잘 모르겠다. 그냥 일반 빵집에서 파는 비슷하게 생긴 빵이랑 맛도 비슷했다. 그래도 날이 점점 추워지기 시작했는데 입에 뭐라도 넣어서 걸으니까 따분하지 않았다. 밤에 본 첨성대는 낮에 본 첨성대와 느낌이 사뭇 달랐다. 낮에는 뭔가 건물 외적인 빼어남에 감탄했다면, 밤에 가서 보았을 때는 조명과 함께 어우러져 풍기는 그 신비로움에 넋을 놓았다.
오후 열시가 다되어서 게스트하우스에 들어왔다. 가는 길에 봉황대의 야경도 구경했는데, 영화 <경주>에서 봉황대에 올라가서 경주 야경을 감상하는 장면을 인상깊게 보아서 그런지 정신줄을 놓았다면 올라갔다가 큰 일 치룰뻔 했다. 경주라는 도시는, 항상 살아숨쉬는 천년고도의 세계로 우리를 인도하다가, 해가 지니 그 나름대로의 새롭고 신비로운 매력으로 다가온다. 무작정 떠난 여행이어서 우여곡절이 많았어도 첫 날부터 참 잘왔다는 그런 흐뭇함이 든다.